티스토리 뷰


저 이승의 선지자
국내도서
저자 : 김보영
출판 : 아작 2017.06.20
상세보기


1. SF가 보여줘야 할 역할과 균형점을 귀신같이 찾는 작가의 센스


   "저 이승의 선지자"는 SF 소설이 갖는 역할에 가장 충실한 소설입니다. 소설가가 SF 소설을 통해 펼쳐낼 수 있고 보여줘야 할 지점에 정확히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참으로 균형감이 좋은 작가가 아닌가 감탄하게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늘 말씀드리지만 SF라는 장르는 "SF만이 우리의 구원이다!"라고 할만한 골수팬과 "그거이 뭔고? 먹는 건가?"라는 반응의 SF알못 독자가 공존합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작품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새로운 세계를 그려나갈 때 골수팬과 일반 독자의 반응 사이에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하는지 안 하는지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한다고 미루어 짐작하기로 하자...) 

   현실 과학의 발전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세계에 대해 점진적인 접근을 해야만 일반 독자들에게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죠. 보통은 쬐끔만 더 나가도 "아웅 골이야 어려워 어려워 때려치워~~"라는 반응을 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SF를 좋아하는 팬들 입장은 전혀 다릅니다. "뭐여 이거 식상하잖아. 이거 밖에 못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죠. 

   그럼 이 양극단의 독자만 있느냐? 저처럼 이도 저도 아닌 매우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독자도 있죠. 생각해보세요. 이거 더러워서 소설 쓰겠습니까?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이냐?'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는 환경입죠. SF가 우리보다 훨씬 폭넓게 사랑받는 나라의 경우야 소설가의 선택에 따라 좀 어렵게 쓰더라도 핵심 팬층이 탄탄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수요는 받아낼 수 있겠죠.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반 독자들에게 어렵다는 반응을 얻을 내용을 용감하게 써버리면 더 과감하고 대담한 독자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게 될 위험이 높습니다. 

   김보영 작가님의 "저 이승의 선지자"는 난해한 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익숙한 세계관을 호로록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그 방향만 감을 잡으면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는 이승의 삶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죠. 이 삶이 마무리되면 저승으로 가서(저승이 있고 없고는 논외로 합시다) 이승의 삶에 대해 '판단' 당하고, 그 결과 평점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행이 결정됩니다. 죽어서도 점수를 받습니다 고마... 그 와중에 사람이나 동물로 환생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저승(소설의 표현으로는 명계)의 신적인 존재가 주연입니다. 이들 '선지자'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소설 속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승에서 인간들의 삶은 옳고 그름도 선도 악도 아닌 그저 "배움"의 일종일 따름이라고 한정해 버리는 것이죠. 그러니, '아 뭐여? 내 소중한 삶이 하나의 시뮬레이션 게임 수준의 의미 없는 것일 뿐이라고?' 하고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소설이 조금씩 진행됨에 따라 작가가 구축한 세계가 금세 익숙해 게 됩니다. 묘사가 좋고, 설정에 대한 설명도 이어지니까요. 

   대중소설로써 이 작품 정도의 사고실험이 SF 소설에서 작가가 보여줘야 할 이상적인 수준에 상당히 근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 동,서양 세계관의 조화가 돋보이는 SF 소설


   벌써 제목에서부터 뉘앙스가 짙게 느껴지지만, 이 소설은 동양적 세계관(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신화의 설정에서)에서는 자주 접할 수 있는 이승(This World)과 사후세계에 대한 익숙한 배경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작가가 꾸민 세계는 이 동양적 기반에다가 서양 신화에서 접하기 쉬운 다신교적 설정이 융합된 형태로 펼쳐지고 있어요. 그리하여 익숙한 것 더하기 익숙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설정이 오묘한 매력이 있는데, '분명 잘 알 것 같은데도 어딘가 생소하고 어색해. 그런데 이상하거나 너무 난해하지는 않아. 뭐야 이거? 어떻게 된다는 거야?' 고마 요런 반응을 하게 만드는 것이죠. 퓨전 음식을 처음 먹을 때의 반응 같은 걸 생각하면 딱 적절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전체적인 토대는 무척 한국적이에요. 그런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서양 신화에 기반한 다신교적 설정을 가져다 씁니다. 다양한 성격의 선지자를 등장시키는 방식으로요. 그런데 이게 또 어려워서 생까임을 당하면 안 되니까 작가가 하나의 안배를 해주고 있습니다. 각 선지자의 이름 자체를 통해 각각의 인격이나 욕망, 지향하는 바를 알기 쉽도록 해주고 있거든요. '탄재', '연심', '망량', 재화' 등등 이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서 조금 더 등장인물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거라도 해야 너무 난해하다는 소리를 좀 덜 들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


   물론 이 소설집은 '저 이승의 선지자'외에 디스토피아 소설 성격의 '새벽기차'라는 재미지는 단편도 있고, '그 하나의 생에 대하여'라는 외전 격 단편도 포함하고 있지만, 표제작만 놓고 봐도 무척 흥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3. 저 이승의 선지자에 나타나는 주제의식에 대해...


   한참을 떠들고 나서야 이 소설의 주제의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 던지는 여러 가지 사고실험 중에 저에게 가장 신경이 쓰이고 와닿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체를 위해서, 우리 집단을 위해서"라는 목적의식에 사로잡힌 대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아마도 최근에 유사종교에 의한 비극이나 음모론 같은 것들에 관심을 두다 보니 더 그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모든 존재의 주체는 애초에 하나였고 이 존재가 '분화'라는 과정을 통해 2세대, 3세대로 개체가 나눠집니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물리적 한계를 초월한 존재로 형체가 정해지지 않아 매우 자유롭고 명계에 존재하는 모든 객체와 이어진 하나의 존재입니다. '분화'된 인격체들은 언제고 '합일'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분화'를 허락한 개체가 스승이 되어 '이승'이라는 학교를 통해 '배움'을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승은 그저 저승의 본질적인 존재인 선지자들이 디자인한 시뮬레이션 학교에 불과합니다. 작가는 '분화'된 존재에 대해서 각각의 이름을 부여하고 인격도 별도로 가진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동시에 언제든 하나의 통합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 부분은 "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 종말의 문제에 관하여"에서 외계인들이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최준식 박사님의 견해와 매우 유사하고 일맥상통해서 흥미로웠습니다. 


   하.. 일일이 설명하자면 너무 긴 내용이기는 한데, 어쨌거나 이들에게 각각의 개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개성도 인격도 중요치 않아요. 어차피 본질은 하나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여차하면 합체하고 합체해서 킹왕짱 하나의 세계가 되면 끝! 그러니까 이승에서 부여받은 인생이라는 것이 머시 중하겠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배움'만 있다면 잊어도 그만인 것이지요. 가만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상한 일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배운다는 말입니까? 명계로 되돌아와 합체하면 다 아는데? 따지고 보면 '분화'와 '이승으로의 시뮬레이션 행동'자체도 무의미한 짓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화'된 개체의 존재 자체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개체가 생겨납니다. 별도로 독립된 존재와 인격에 대해 스스로 애착을 가지고 시뮬레이션 속에서 부여받은 역할에 몰입해서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해야 할지 빠져나오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고 해야 할지. 이런 상황에 빠진 개체는 등급이 낮아진달까, 다운그레이드가 되어서 하나의 형체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원래의 존재처럼 무형으로 변하지 못하고 물리적인 한계에 제약을 받는 3차원적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이런 상태를 "타락"이라고 칭합니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갖는 것을 '타락'이라는 부정적인 어휘로 정의하는데 이 소설의 핵심이 있다고 봅니다. 크게 보아 하나인 다수가 각각의 개성과 인격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전체를 위해 행동하고 '합일'해야 한다는 대전제의 강요는 흡사 인간사에서 볼 수 있는 "전체주의" 같아 보입니다. 무슨 "주의"운운할 것도 없이 대기업 같은 기업체나 검찰, 기무사, 정보기관 등의 조직 내에서 "개인의 합리적 판단"은 의미가 없고, 누군가가 하사하는 '지침'에 따라 "합일"하여 공동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인간적인"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대의"가 중요할 뿐이지요. 


   개개의 입장이나 사정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고, 심지어 짓밟을 수도 있지요. 전체가 하나고 그 하나를 위한 "대의"라는 명분이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개개인의 인격과 형편을 살피는 행위는 "타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타락한 개체를 찾아 "합일"하여 없애는 것만이 전체의 타락을 막는 길입니다. '저 이승의 선지자'에서는 "아만"이라는 선지자가 타락의 길에 빠져 '분화'된 개체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소설의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 '나반'은 수많은 '아만'을 찾아 합일하고 없애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흡사, 우리 사회에서 '억압'에 맞서 자신의 소리를 내는 수많은 개개인을 찾아 사찰하고 온, 오프라인으로 공격하고 사회에서 격리시키려는 시도와 닮아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다행히 이 방식이 실패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실제로 세상이 발전할수록 이런 시도는 어려워지고 개별화된 개체의 가치를 찾아가게 되겠지요. 디스토피아로 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제법 뒷골이 당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국열차와 비교해서 보면 좋을만한 단편 "새벽기차"도 무척 매력적이었는데 이거 참 너무 길어져서 자세히 쓰기 부담스럽군요.





  


"외계지성체의 책 리뷰 쓰기"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댓글